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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예루살렘 멸망===
===70년 예루살렘 멸망===
[[File:Roberts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jpg|섬네일|로마 군대에 포위돼 무너지는 예루살렘.<br>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
[[File:Roberts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jpg|섬네일|로마 군대에 포위돼 무너지는 예루살렘.<br>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민족은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 (키루스 2세)|고레스(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경 바벨론을 정복한 이후 본국에 귀환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결과 이방인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에 모세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로 결심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느헤미야#10장 |제목=느헤미야 10:29–31|인용문=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ref>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졌다. 지나친 율법주의는 자신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나타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ref>{{웹 인용|제목=[문명의 고향을 찾아서] 이스라엘 예루살렘|url=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6/25/1997062570185.html|저널=조선일보|출판사=|날짜=1997. 6. 25|인용문=이스라엘인들의 율법주의는 자연히 다른 부류 사람들을 멸시했고 자신들이 '성서'의 유일한 해석자라고 믿었으며 의는 엄격한 율법을 실행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마디로 권위주의·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공격을 받았다.예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도덕주의자로서 아무 잘못이 없다. 그래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3 이하)는 예수의 '산상수훈' 메시지는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를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다.}}</ref>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달라”고 외쳤다.<ref>{{웹 인용 |url= 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마태복음#27장 |제목=마태복음 27:23–25|저널= |인용문=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ref> 그들이 자청한 대로 기원후 70년 혹독한 죗값을 치렀다.<br>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민족은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 (키루스 2세)|고레스(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경 바벨론을 정복한 이후 본국에 귀환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결과 이방인의 침략을 받고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에 모세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로 결심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느헤미야#10장 |제목=느헤미야 10:29–31|인용문=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ref>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졌다. 지나친 율법주의는 자신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나타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ref>{{웹 인용|제목=[문명의 고향을 찾아서] 이스라엘 예루살렘|url=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6/25/1997062570185.html|저널=조선일보|출판사=|날짜=1997. 6. 25|인용문=이스라엘인들의 율법주의는 자연히 다른 부류 사람들을 멸시했고 자신들이 '성서'의 유일한 해석자라고 믿었으며 의는 엄격한 율법을 실행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한마디로 권위주의·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공격을 받았다.예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도덕주의자로서 아무 잘못이 없다. 그래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3 이하)는 예수의 '산상수훈' 메시지는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를 반역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다.}}</ref>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려달라”고 외쳤다.<ref>{{웹 인용 |url= 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마태복음#27장 |제목=마태복음 27:23–25|저널= |인용문=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ref> 그들이 자청한 대로 기원후 70년 혹독한 죗값을 치렀다.<br>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67년, 이스라엘에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Vespasian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보냈다. 68년 황제 네로의 자살 이후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돌아갔다. 유대 전쟁 작전권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Titus 티투스]가 이어받았다. 그는 70년 봄 작전 수위를 높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해 여름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성전을 공격했다. 성전과 도시는 폐허로 변했으며 성안의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로마 군대의 칼에 죽었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Flavius-Josephus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유대인 110만 명이 죽고 9만 7000명이 노예로 잡혀갔다. 반면 당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에워싸여 멸망하기 전에 동 요르단에 있던 펠라성으로 피난했다고 한다.<ref>{{인용 |url= |제목=유대 전쟁사 2 |웹사이트= |저널= |출판사=나남 |날짜= |연도= |저자=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저자링크= |저자2= |저자링크2= |쪽= |시리즈= |언어= |번역제목= |isbn=978-89-300-8314-0 |인용문=}}</ref>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67년, 이스라엘에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Vespasian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보냈다. 68년 황제 네로의 자살 이후 황제로 추대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돌아갔다. 유대 전쟁 작전권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Titus 티투스]가 이어받았다. 그는 70년 봄 작전 수위를 높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그해 여름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성전을 공격했다. 성전과 도시는 폐허로 변했으며 성안의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로마 군대의 칼에 죽었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Flavius-Josephus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유대인 110만 명이 죽고 9만 7000명이 노예로 잡혀갔다. 반면 당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에워싸여 멸망하기 전에 동 요르단에 있던 펠라성으로 피난했다고 한다.<ref>{{인용 |url= |제목=유대 전쟁사 2 |웹사이트= |저널= |출판사=나남 |날짜= |연도= |저자=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저자링크= |저자2= |저자링크2= |쪽= |시리즈= |언어= |번역제목= |isbn=978-89-300-8314-0 |인용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