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2번째 줄:


== 파스카 논쟁의 원인 ==
== 파스카 논쟁의 원인 ==
초대교회는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누가복음#22장 |제목=누가복음 22:15 |저널= |인용문=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ref> 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πασχα, Pascha, 파스카) 성찬식을 행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11장 |제목=고린도전서 11:23-25 |저널= |인용문=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ref> 이날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11장 |제목=고린도전서 11:26 |저널= |인용문=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ref><ref name="누룩">{{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5장 |제목=고린도전서 5:7-8 |저널= |인용문=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ref> 유월절 다음 날인 15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무교절]]을 지켰고, 이후 돌아오는 첫 일요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지켰다.  
초대교회는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누가복음#22장 |제목=누가복음 22:15 |저널= |인용문=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ref> 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πασχα, Pascha, 파스카) 성찬식을 행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11장 |제목=고린도전서 11:23-25 |저널= |인용문=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ref> 이날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11장 |제목=고린도전서 11:26 |저널= |인용문=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ref><ref name="누룩">{{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고린도전서#5장 |제목=고린도전서 5:7-8 |저널= |인용문=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ref> 유월절 다음 날인 15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무교절]]을 지켰고, 이후 돌아오는 첫 일요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지켰다.  
<br>
<br>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초대교회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로 나뉘게 된다. 동방 교회는 사도들이 전해준 가르침대로 예수님께서 고난받기 전날인 성력 1월 14일에 유월절 성찬식을 행했다. 그러나 로마교회(서방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한 후 부활하신 일요일에 성찬식을 행했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초대교회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로 나뉘게 된다. 동방 교회는 사도들이 전해준 가르침대로 예수님께서 고난받기 전날인 성력 1월 14일에 유월절 성찬식을 행했다. 그러나 로마교회(서방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한 후 부활하신 일요일에 성찬식을 행했다.
22번째 줄: 22번째 줄:
== 제1차 파스카 논쟁==
== 제1차 파스카 논쟁==
{{그림|Burghers michael saintpolycarp.jpg|정렬=오른쪽섬네일|너비=100px|타이틀=폴리카르포스}}
{{그림|Burghers michael saintpolycarp.jpg|정렬=오른쪽섬네일|너비=100px|타이틀=폴리카르포스}}
155년경 [[서머나 (스미르나)|서머나]]교회(동방 교회)의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carpos, 폴리캅)로마교회의 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 사이에 벌어진 유월절 날짜 논쟁이다.<ref>J. W. C. 완드, 《교회사(초대편)》,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122쪽, <q>155년에 폴리캅[폴리카르포스]은 로마 교황 아니케터스(Anicetus)와 이 문제를 토론하였으나 양편이 다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가 없어서 서로 다르게 그날을 지키기로 합의를 보았다.</q></ref> 로마를 방문한 폴리카르포스는 아니케투스에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 그리고 여러 사도들과 함께 매년 유월절을 지켜왔다'며 예수와 사도들의 전승대로 니산월(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니케투스는 전임 감독들의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설복시킬 수 없어 각자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르기로 했다.<ref>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 역, 은성, 2001, 265쪽, <q>아니케투스가 로마 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폴리갑[폴리카르포스]이 로마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의견의 차이가 있었으나 곧 서로 화해했으며, 이 주제로 서로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세투스[아니케투스]는 폴리갑에게 그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권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폴리갑은 주의 제자 요한, 그리고 그와 교제한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그것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폴리갑도 아니세투스에게 그 관습을 지키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니세투스는 전임 감독들의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q></ref><ref>[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351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가톨릭신문》, 2002. 11. 17., <q>폴리카르푸스는 생애 말기에 로마로 건너가 주교 아니체투스와 부활절 날짜, 단식 문제와 같은 교회의 여러 현안을 놓고 협의하였다. 아시아 지방의 대표로서 폴리카르푸스는 당시 서방의 관습과 달리, 사도 요한의 전통에 따라 과월절 전날인 니산달 14일에 부활절을 거행하는 「14일파」를 변론하였다. 부활절 날짜 문제는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체투스의 주장이 서로 달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q></ref>
155년경 [[서머나 (스미르나)|서머나]]교회(동방 교회)의 감독 폴리카르포스(Polycarpos, 폴리캅)로마교회의 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 사이에 벌어진 유월절 날짜 논쟁이다.<ref>J. W. C. 완드, 《교회사(초대편)》, 이장식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0, 122쪽, <q>155년에 폴리캅[폴리카르포스]은 로마 교황 아니케터스(Anicetus)와 이 문제를 토론하였으나 양편이 다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가 없어서 서로 다르게 그날을 지키기로 합의를 보았다.</q></ref> 로마를 방문한 폴리카르포스는 아니케투스에게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 그리고 여러 사도들과 함께 매년 유월절을 지켜왔다'며 예수와 사도들의 전승대로 니산월(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니케투스는 전임 감독들의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설복시킬 수 없어 각자 전임 감독들의 전승을 따르기로 했다.<ref>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엄성옥 역, 은성, 2001, 265쪽, <q>아니케투스가 로마 교회의 감독으로 있을 때, 폴리갑[폴리카르포스]이 로마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 의견의 차이가 있었으나 곧 서로 화해했으며, 이 주제로 서로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세투스[아니케투스]는 폴리갑에게 그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권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폴리갑은 주의 제자 요한, 그리고 그와 교제한 나머지 사도들과 함께 그것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폴리갑도 아니세투스에게 그 관습을 지키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니세투스는 전임 감독들의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q></ref><ref>[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139351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가톨릭신문》, 2002. 11. 17., <q>폴리카르푸스는 생애 말기에 로마로 건너가 주교 아니체투스와 부활절 날짜, 단식 문제와 같은 교회의 여러 현안을 놓고 협의하였다. 아시아 지방의 대표로서 폴리카르푸스는 당시 서방의 관습과 달리, 사도 요한의 전통에 따라 과월절 전날인 니산달 14일에 부활절을 거행하는 「14일파」를 변론하였다. 부활절 날짜 문제는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체투스의 주장이 서로 달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q></ref>


==제2차 파스카 논쟁==
==제2차 파스카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