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종교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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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신조''' | *'''모호한 신조''' | ||
니케아 공회의에서 채택한 '[[성부 (여호와)|성부]]와 [[성자 (예수)|성자]]는 동등하다'라는 신조는 아리우스파를 일시적으로 단죄했을지는 몰라도, 이 또한 성경적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로 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는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개념이 모호하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91-95쪽,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정말 난해한 용어였다. ... 그러니까 호모우시오스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고안하고, 세례받지 않은 황제가 제안하였으며, 순박한 지지자들은 이 용어를 위험스럽게 여겼는데, 마침내 정통교회가 이 용어를 승인하여 '니케아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모순의 상징이 되었다.”</ref>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ref>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57쪽, “기독교도들은 ... 예수의 신격과 삼위 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했다. <br> | 니케아 공회의에서 채택한 '[[성부 (여호와)|성부]]와 [[성자 (예수)|성자]]는 동등하다'라는 신조는 아리우스파를 일시적으로 단죄했을지는 몰라도, 이 또한 성경적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로 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는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개념이 모호하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91-95쪽,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정말 난해한 용어였다. ... 그러니까 호모우시오스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고안하고, 세례받지 않은 황제가 제안하였으며, 순박한 지지자들은 이 용어를 위험스럽게 여겼는데, 마침내 정통교회가 이 용어를 승인하여 '니케아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모순의 상징이 되었다.”</ref>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ref>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57쪽, “기독교도들은 ... 예수의 신격과 삼위 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했다. <br> | ||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 오늘날까지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기독교인]]뿐 아니라 신학자들까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은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은 쉽게 시인하지 못한다. 성부와 성자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속할지라도 그 안에서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교회도 있고, 예수님을 인간과 같은 피조물이나 [[천사]] 중의 하나로 여기는 교회도 있다. 성부와 성자에 대해 뜻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일체라고는 표현하지만 실상 성부와 성자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대에 이르러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교파는 아리우스주의의 한 형태로 본다.<br> | ||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니케아 공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유명무실하게 신학 교리로 전해졌다. |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니케아 공회의 이후의 기독교는 '성부=성령', '성자=성령'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유명무실하게 신학 교리로 전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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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황제로 선임했다.<br> | ||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br> |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br> |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ref>《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ref>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ref>《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ref>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