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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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시대의 다윗성===
===왕국 시대의 다윗성===
[[파일:Inside Hezekiah's Tunnel-B (3782618647).jpg |섬네일 | px 700 |히스기야 터널 내부]]
[[파일:Inside Hezekiah's Tunnel-B (3782618647).jpg |섬네일 | px 700 |히스기야 터널 내부]]
다윗을 뒤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다윗성 북쪽에 인접한 모리아산 일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장 |제목=역대하 3:1 |저널= |인용문=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ref> 성전 건축이 끝나자 다윗성에 있던 언약궤를 모리아산에 건축된 성전으로 옮겼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상#8장 |제목=열왕기상 8:1, 6 |저널= |인용문=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ref><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5장 |제목=역대하 5:2, 7 |저널= |인용문=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소집하니 ...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ref> <br>세월이 흐르면서 다윗성이 있던 시온산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모리아산을 합쳐 모두 시온으로 부르게 되었다. '시온'이 하나의 도시나 산에 불과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시편#78장 |제목=시편 78:68-69 |저널= |인용문=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ref><ref>{{인용 |url= |제목=시편 78:68-69 |웹사이트= |저널=공동번역성서 |출판사=대한성서공회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 유다 지파를 뽑으셨으니 곧 사랑하시는 시온산이었다. 거기에, 당신께서 머물 거룩한 집을, 땅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터 위에 하늘처럼 드높이 세우셨다.}}</ref>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에는 떠나온 본국 이스라엘을 시온으로 통칭할 만큼 '시온'을 소중하게 여겼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시편#137장 |제목=시편 137:1 |저널= |인용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ref>  
다윗을 뒤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다윗성 북쪽에 인접한 모리아산 일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장 |제목=역대하 3:1 |저널= |인용문=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ref> 성전 건축이 끝나자 다윗성에 있던 언약궤를 모리아산에 건축된 성전으로 옮겼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상#8장 |제목=열왕기상 8:1, 6 |저널= |인용문=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ref><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5장 |제목=역대하 5:2, 7 |저널= |인용문=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소집하니 ...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ref> <br>세월이 흐르면서 다윗성이 있던 시온산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모리아산을 합쳐 모두 시온으로 부르게 되었다. '시온'이 하나의 도시나 산에 불과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시편#78장 |제목=시편 78:68-69 |저널= |인용문=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ref><ref>{{인용 |url= |제목=시편 78:68-69 |웹사이트= |저널=공동번역성서 |출판사=대한성서공회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 유다 지파를 뽑으셨으니 곧 사랑하시는 시온산이었다. 거기에, 당신께서 머물 거룩한 집을, 땅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터 위에 하늘처럼 드높이 세우셨다.}}</ref>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에는 떠나온 본국 이스라엘을 시온으로 통칭할 만큼 '시온'을 소중하게 여겼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시편#137장 |제목=시편 137:1 |저널= |인용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ref>  
남 유다의 13대 왕이 된 히스기야는 앗수르(아시리아) 군대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확장 보수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2장 |제목=역대하 32:2-5 |저널= |인용문=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ref> 학자들은 그때 다윗성 서쪽으로 성이 확대된 것으로 생각한다.<ref>{{인용 |url= |제목=두란노 성서지도 |웹사이트= |저널= |출판사=사단법인 두란노서원 |날짜=2013.4.15. |연도= |저자=토마스 V. 브리스코 |쪽= |시리즈= |isbn=9788953114524 |인용문=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예루살렘이 서쪽으로 확장한 것은 히스기야왕 때(BC 715-687년)부터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피해 이스라엘에서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온 것도 히스기야의 확장 정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ref> 또한 히스기야는 지하 터널을 만들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의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2장 |제목=역대하 32:30 |저널= |인용문=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ref>  그래서 요시야왕 때의 기록에는 둘째 구역이 언급되어 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하#22장 |제목=열왕기하 22:14 |저널= |인용문=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ref><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4장 |제목=역대하 34:22 |저널= |인용문= 이에 힐기야와 왕의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ref>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파괴되었다.
남 유다의 13대 왕이 된 히스기야는 앗수르(아시리아) 군대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확장 보수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2장 |제목=역대하 32:2-5 |저널= |인용문=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그 방백들과 용사들로 더불어 의논하고 ...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성의 밀로를 견고케 하고 병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ref> 학자들은 그때 다윗성 서쪽으로 성이 확대된 것으로 생각한다.<ref>{{인용 |url= |제목=두란노 성서지도 |웹사이트= |저널= |출판사=사단법인 두란노서원 |날짜=2013.4.15. |연도= |저자=토마스 V. 브리스코 |쪽= |시리즈= |isbn=9788953114524 |인용문=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예루살렘이 서쪽으로 확장한 것은 히스기야왕 때(BC 715-687년)부터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피해 이스라엘에서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온 것도 히스기야의 확장 정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ref> 또한 히스기야는 지하 터널을 만들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의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2장 |제목=역대하 32:30 |저널= |인용문=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ref>  그래서 요시야왕 때의 기록에는 둘째 구역이 언급되어 있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하#22장 |제목=열왕기하 22:14 |저널= |인용문=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ref><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역대하#34장 |제목=역대하 34:22 |저널= |인용문= 이에 힐기야와 왕의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하스라의 손자 독핫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ref>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과 성벽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