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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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주의 국가 멸망=== | ===아리우스주의 국가 멸망=== | ||
[[File:Christian states 495 AD (en).svg|Christian_states_495_AD_(en)|섬네일|495년경 아리우스주의를 따른 게르만족(주황색)과 니케아 신조를 따른 동로마 제국(청록색)]] | [[File:Christian states 495 AD (en).svg|Christian_states_495_AD_(en)|섬네일|495년경 아리우스주의를 따른 게르만족(주황색)과 니케아 신조를 따른 동로마 제국(청록색)]] | ||
서방의 가톨릭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믿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동로마 제국에서 527년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A%B3%BC_%EB%B9%84%EC%9E%94%ED%8B%B4_%EB%AC%B8%ED%99%94#%EC%9C%A0%EC%8A%A4%ED%8B%B0%EB%8B%88%EC%95%84%EB%88%84%EC%8A%A4_%ED%99%A9%EC%A0%9C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틴어: Flavius Petrus Sabbatius Justinianus, 재위: 527–565)가 황제로 즉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와 서로마를 합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즉위 전부터 분열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이 곧 하나의 로마제국으로 재통일되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519년 로마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Justinus, 재위: 518–527)의 조카이자 내무대신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가톨릭이 이단으로 지목한 동로마 제국의 감독들을 파문하는 데 동의했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311-313쪽. <q>519년 3월 25일에는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열째 초석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영접을 받았다. 이틀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요한네스 총대주교는 옛 로마와 새 로마의 교회가 나눌 수 없는 하나라고 선언하고, ... 모든 이단 종파에 대한 파문장을 엄숙하게 낭독했다.</q></ref> 이후 황제가 되어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이 아닌 이단 아리우스주의와 이교를 숙청했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331-332쪽. <q>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교회 관련 사안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존하신 옛 로마의 교황은 모든 성직자 중 최선임자요, 새로운 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 바로 다음의 위상을 지니며, 기타의 다른 모든 교구에 우선하는 위치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 그는 동로마 지역에 상당수 남아 있는 이교들을 숙청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였다.</q></ref> 534년에는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박해한 반달족을 무너뜨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으며,<ref>[https://www.britannica.com/topic/Vandal-Germanic-people "Vandal,"] <i>Encyclopaedia Britannica</i></ref> 535년에는 동고트족에 전쟁을 | 서방의 가톨릭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믿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동로마 제국에서 527년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A%B3%BC_%EB%B9%84%EC%9E%94%ED%8B%B4_%EB%AC%B8%ED%99%94#%EC%9C%A0%EC%8A%A4%ED%8B%B0%EB%8B%88%EC%95%84%EB%88%84%EC%8A%A4_%ED%99%A9%EC%A0%9C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틴어: Flavius Petrus Sabbatius Justinianus, 재위: 527–565)가 황제로 즉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로마와 서로마를 합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즉위 전부터 분열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이 곧 하나의 로마제국으로 재통일되는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519년 로마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당시 황제 유스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Justinus, 재위: 518–527)의 조카이자 내무대신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가톨릭이 이단으로 지목한 동로마 제국의 감독들을 파문하는 데 동의했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311-313쪽. <q>519년 3월 25일에는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열째 초석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영접을 받았다. 이틀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요한네스 총대주교는 옛 로마와 새 로마의 교회가 나눌 수 없는 하나라고 선언하고, ... 모든 이단 종파에 대한 파문장을 엄숙하게 낭독했다.</q></ref> 이후 황제가 되어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하고, 로마 가톨릭이 아닌 이단 아리우스주의와 이교를 숙청했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331-332쪽. <q>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임자들보다 더 강력하고 조직적으로 교회 관련 사안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지존하신 옛 로마의 교황은 모든 성직자 중 최선임자요, 새로운 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청의 교황 바로 다음의 위상을 지니며, 기타의 다른 모든 교구에 우선하는 위치에 있다."라고 선언했다. ... 그는 동로마 지역에 상당수 남아 있는 이교들을 숙청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였다.</q></ref> 534년에는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박해한 반달족을 무너뜨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으며,<ref>[https://www.britannica.com/topic/Vandal-Germanic-people "Vandal,"] <i>Encyclopaedia Britannica</i></ref> 535년에는 동고트족에 전쟁을 선포했다.<ref>[https://www.britannica.com/topic/Ostrogoth "Ostrogoth,"] <i>Encyclopaedia Britannica</i></ref> 그리하여 결국 멸망시켰다. 당시 반달족과 동고트족은 모두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후 다른 게르만족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바꾸었다.<ref>James Hastings et al., "ARIANISM,"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1, Charles Scribner's Sons, 1908, p. 783, "Every barbarian kingdom ultimately abandoned Arianism, or else as in the case of the Ostrogoths in Italy and the Vandals in Africa, Arianism proved one of the causes of national ruin. . . . and each in turn, after a severe struggle, abandoned the form of Christianity in which they had been instructed for the Niceno-Roman faith."</ref> | ||
==현대의 아리우스주의== | ==현대의 아리우스주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