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사살 (벨사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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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Belshazzar’s feast, by Rembrandt.jpg|섬네일|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벨사살의 연회>]]
[[File:Belshazzar’s feast, by Rembrandt.jpg|섬네일|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벨사살의 연회>]]
'''벨사살'''(벨사자르, 영어: Belshazzar 또는 Balthazar, 히브리어: בֵּלְשַׁאצַּר,<ref>[https://dict.naver.com/hbokodict/hebrew/#/entry/hboko/6e294f7c3b0742a6b95f2fe6ae132add "בֵּלְשַׁאצַּר"], 《고대 히브리어 사전》</ref> B.C. 550-B.C. 539)은 [[바벨론]](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2816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 히브리어: נְבוּכַדְנֶאצַּר<ref>[https://dict.naver.com/hbokodict/hebrew/#/entry/hboko/84d456d93d764121985250a2efd74d19 "נְבוּכַדְנֶאצַּר"], 《고대 히브리어 사전》</ref> )의 손자이며,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5299 나보니두스](Nabonidus, 재위: B.C. 556-B.C. 539)의 장자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성경 [[다니엘 (성경)|다니엘서]]에만 이름이 있을 뿐, 바벨론에 대한 어떤 역사서나 기록에서도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성경]]이 허구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854년과 1879년에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그의 역사적 실존이 증명됐다.   
'''벨사살'''(벨사자르, 영어: Belshazzar 또는 Balthazar, 히브리어: בֵּלְשַׁאצַּר,<ref>[https://dict.naver.com/hbokodict/hebrew/#/entry/hboko/6e294f7c3b0742a6b95f2fe6ae132add "בֵּלְשַׁאצַּר"], 《고대 히브리어 사전》</ref> 재위: B.C. 550-B.C. 539)은 [[바벨론]](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2816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 히브리어: נְבוּכַדְנֶאצַּר<ref>[https://dict.naver.com/hbokodict/hebrew/#/entry/hboko/84d456d93d764121985250a2efd74d19 "נְבוּכַדְנֶאצַּר"], 《고대 히브리어 사전》</ref> )의 손자이며,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35299 나보니두스](Nabonidus, 재위: B.C. 556-B.C. 539)의 장자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성경 [[다니엘 (성경)|다니엘서]]에만 이름이 있을 뿐, 바벨론에 대한 어떤 역사서나 기록에서도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성경]]이 허구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854년과 1879년에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면서 그의 역사적 실존이 증명됐다.   


==시대적 배경==
==시대적 배경==
기원전 586년경 [[남 유다 왕국|남 유다]]를 정복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약탈해 간 동시에 유다의 왕족과 귀족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하#24장 |제목=열왕기하 24-25장 |저널= |인용문= }}</ref> 다니엘도 이때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시기에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느부갓네살은 제국의 인력을 총동원해 바벨론 도성을 재정비했고 그곳 사람들은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삶을 만끽했다.<ref>마노 다카야, "바빌론", 《낙원》, 도서출판 들녘, 2000, "이 나보폴라사르 왕의 아들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enezzar Ⅱ: 재위 B.C. 605~B.C. 562)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제국을 더욱 강한 나라로 확대했다. 성서 속에서 그의 '악명'만이 눈에 띄는 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방대한 전리품과 함께 많은 유대인 포로를 연행했기 때문이다. ...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아버지가 못다 이룩한 사업에 투자했다. ... 도시 재건을 위해서 '북에서 남까지, 산간지역에서 해안지대까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헤로도토스에 의하면)라고 절찬받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이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생활을 구가했을 것이다."</ref><br>
기원전 586년경 [[남 유다 왕국|남 유다]]를 정복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약탈해 간 동시에 유다의 왕족과 귀족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열왕기하#24장 |제목=열왕기하 24-25장 |저널= |인용문= }}</ref> 다니엘도 이때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시기에 바벨론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느부갓네살은 제국의 인력을 총동원해 바벨론 도성을 재정비했고 그곳 사람들은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삶을 만끽했다.<ref>마노 다카야, "바빌론", 《낙원》, 임희선 역, 들녘, 2000, "이 나보폴라사르 왕의 아들이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enezzar Ⅱ: 재위 B.C. 605~B.C. 562)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제국을 더욱 강한 나라로 확대했다. 성서 속에서 그의 '악명'만이 눈에 띄는 것은 구약성서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방대한 전리품과 함께 많은 유대인 포로를 연행했기 때문이다. ...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얻은 부와 권력을 아버지가 못다 이룩한 사업에 투자했다. ... 도시 재건을 위해서 '북에서 남까지, 산간지역에서 해안지대까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원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떠한 도시보다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헤로도토스에 의하면)라고 절찬받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이 낙원과도 같은 도시에서의 생활을 구가했을 것이다."</ref><br>
그러나 느부갓네살 사후 바벨론의 국운은 급속히 기울어, 기원전 539년경 벨사살 때 [[메대 바사 (페르시아)|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키루스 2세)|고레스(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사후 바벨론의 국운은 급속히 기울어, 기원전 539년경 벨사살 때 [[메대 바사 (페르시아)|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 (키루스 2세)|고레스(키루스 2세)]]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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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사살의 실존 증거 ==
== 벨사살의 실존 증거 ==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경의 다니엘서 기록 외에는 어떤 바벨론 사료에서도 벨사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다.<ref>{{웹 인용 |url=https://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519426&section=sc11 |제목=예술혼을 위하여 (111 -페르시아와 바빌론의 유수 |웹사이트= |저널=브레이크뉴스 |출판사= |날짜=2017. 7. 11.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이러한 '나보니도스 왕' 시대에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을 창건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BC. 580~BC. 529)이 BC. 540년 엘람 왕국의 수도이었던 수사(Susa)를 점령한 이후 신바빌로니아를 침략하였습니다. '나보니도스 왕'의 아들 '벨사살'(Belshazzar. ?~BC. 539)이 군 사령관으로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아케메네스 제국에 무릎을 꿇어 BC. 539년 '나보니도스 왕'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입니다. }}</ref> 이에 일각에서는 벨사살을 언급한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이 같은 주장을 뒤집는 유물이 발견됐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벨사살은 역사적으로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경의 다니엘서 기록 외에는 어떤 바벨론 사료에서도 벨사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고증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다. 이에 일각에서는 벨사살을 언급한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대 바벨론 유역에서 이 같은 주장을 뒤집는 유물이 발견됐다.
===나보니두스 실린더 ===
===나보니두스 실린더 ===
1854년 고고학자들이 고대 바벨론 우르(Ur)의 신전 폐허 속에서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W_K-1692 나보니두스 실린더](Nabonidus Cylinder) 4점을 발견했다. 이 실린더들에는 놀라운 기록이 동일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장자 벨사살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1854년 고고학자들이 고대 바벨론 우르(Ur)의 신전 폐허 속에서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W_K-1692 나보니두스 실린더](Nabonidus Cylinder) 4점을 발견했다. 이 실린더들에는 놀라운 기록이 동일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라고 알려진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장자 벨사살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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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 실린더를 발견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이 하나 더 발견됐다.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W_Sp-II-964 나보니두스 연대기](Nabonidus Chronicle)다. 1879년에 대영박물관이 한 유물 상인을 통해 입수한 이 비문에는 나보니두스의 통치 기간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나보니두스 치하의 바벨론 멸망과 고레스 치하의 바사 제국의 시작에 대한 역사다.<br>
나보니두스 실린더를 발견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이 하나 더 발견됐다.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W_Sp-II-964 나보니두스 연대기](Nabonidus Chronicle)다. 1879년에 대영박물관이 한 유물 상인을 통해 입수한 이 비문에는 나보니두스의 통치 기간의 기록이 담겨 있었다. 나보니두스 치하의 바벨론 멸망과 고레스 치하의 바사 제국의 시작에 대한 역사다.<br>
이 서판에는 나보니두스가 그의 통치 말엽 약 10년 동안 바벨론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재위 7년부터 16년까지 약 10년 동안 나보니두스는 테마(Tema, 성경의 데마)<ref>[https://dict.naver.com/hbokodict/#/entry/hboko/ebbcaa1fa2fb4aa69a924998ea9bf12e "תֵּימָא"], 《고대 히브리어 사전》, "사막, 경작되지 않은 지역: 시리아 사막 변경에 위치한 아라비아 광야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나라 '데마'[이스마엘의 아들 데마에서 유래], 창25:15."</ref> 혹은 [https://www.livius.org/articles/place/tayma-oasis/ 타이마(Tayma)]라는 아라비아사막의 도시에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장자 '벨사살(Belshar-usur, 벨사르-우수르)'이 군대와 함께 바벨론 궁을 지켰다는 것이다.<ref>{{웹 인용 |url=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mesopotamian-chronicles-content/abc-7-nabonidus-chronicle/
이 서판에는 나보니두스가 그의 통치 말엽 약 10년 동안 바벨론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재위 7년부터 16년까지 약 10년 동안 나보니두스는 테마(Tema, 성경의 데마)<ref>[https://dict.naver.com/hbokodict/#/entry/hboko/ebbcaa1fa2fb4aa69a924998ea9bf12e "תֵּימָא"], 《고대 히브리어 사전》, "사막, 경작되지 않은 지역: 시리아 사막 변경에 위치한 아라비아 광야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나라 '데마'[이스마엘의 아들 데마에서 유래], 창25:15."</ref> 혹은 [https://www.livius.org/articles/place/tayma-oasis/ 타이마(Tayma)]라는 아라비아사막의 도시에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장자 '벨사살(Belshar-usur, 벨사르-우수르)'이 군대와 함께 바벨론 궁을 지켰다는 것이다.<ref>{{웹 인용 |url=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mesopotamian-chronicles-content/abc-7-nabonidus-chronicle/
  |제목=ABC 7 (Nabonidus Chronicle) |웹사이트=Livius.org |저널= |출판사=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게다가 우리는 나보니도스가 바벨론에 10년 동안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신에 그는 아라비아를 지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년에 그는 바벨론에서 아카바만으로 가는 직통 도로를 장악하던 에돔 왕국을 정복했다. 나보니두스는 제7년부터 제16년까지 아랍 사막에 있는 타이마의 오아시스에 머물렀고, 그곳에서부터 남쪽의 오아시스 야트리브(현재의 메디나)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In addition, we learn that Nabonidus was not in Babylon for ten years. Instead, he seems to have tried to subject Arabia. In year three he conquered the kingdom Edom, which controls the direct road from Babylon to the Gulf of Aqaba. From year seven until year sixteen, Nabonidus stayed in the oasis of Tayma in the Arab desert, from where he could easily go as far south as the oasis Yatrib (modern Medina)]. }}</ref>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에서 멀리 떨어진 테마에 체류하는 동안 후계자 벨사살이 실질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제목="ABC 7 (Nabonidus Chronicle)" |웹사이트=Livius.org |저널= |출판사=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게다가 우리는 나보니도스가 바벨론에 10년 동안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신에 그는 아라비아를 지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년에 그는 바벨론에서 아카바만으로 가는 직통 도로를 장악하던 에돔 왕국을 정복했다. 나보니두스는 제7년부터 제16년까지 아랍 사막에 있는 타이마의 오아시스에 머물렀고, 그곳에서부터 남쪽의 오아시스 야트리브(현재의 메디나)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In addition, we learn that Nabonidus was not in Babylon for ten years. Instead, he seems to have tried to subject Arabia. In year three he conquered the kingdom Edom, which controls the direct road from Babylon to the Gulf of Aqaba. From year seven until year sixteen, Nabonidus stayed in the oasis of Tayma in the Arab desert, from where he could easily go as far south as the oasis Yatrib (modern Medina)]. }}</ref>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에서 멀리 떨어진 테마에 체류하는 동안 후계자 벨사살이 실질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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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 연대기'''
|+'''나보니두스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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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발견으로 성경이 그 어떤 역사서보다 더 정확한 기록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854년에 영국의 저명 잡지인 《애서니엄》(The Athenaeum)<ref>문학과 과학, 예술에 중점을 두고 발행된 잡지로, 영국에서 182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출판된 영향력 있는 정기간행물</ref>은 우르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 실린더에 벨사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실린더의 특별한 가치와 의미도 함께 보도했다.[[파일:아테나움, 1854년 3월호.jpg|섬네일|200px|왼쪽|<small>《애서니엄》, 1854년 3월호, 341쪽</small>]]
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발견으로 성경이 그 어떤 역사서보다 더 정확한 기록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854년에 영국의 저명 잡지인 《애서니엄》(The Athenaeum)<ref>문학과 과학, 예술에 중점을 두고 발행된 잡지로, 영국에서 1828년에서 1921년 사이에 출판된 영향력 있는 정기간행물</ref>은 우르에서 발견된 나보니두스 실린더에 벨사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실린더의 특별한 가치와 의미도 함께 보도했다.[[파일:아테나움, 1854년 3월호.jpg|섬네일|200px|왼쪽|<small>《애서니엄》, 1854년 3월호, 341쪽</small>]]
{{인용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공개한 대로 '''나보니두스의 장남 벨사살'''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그 벨사살'''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위대한 역사적 문제를 설명할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벨사살이 그의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서 바벨론의 통치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바벨론 도시는 메데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에게 공격당했고 뒤이은 습격으로 멸망했을 것이다. 당시 군대를 이끌어 도시를 구하려던 나보니두스는 패배하고 인근 도시인 보르시파(또는 비르시님루드)로 피난해야 했고, 잠시 저항하다가 항복했다. <small>[고대 바벨론의 역사가]</small>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보니두스는 이후 카르마니아에서 명예로운 퇴위 명령을 받았다. 실제로,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살의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역사<small>―예를 들어, 그것은 헤로도토스와 베로수스와 관련이 있지만 크세노폰의 로맨스나 크테시아스의 우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small>를 우리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장벽이 되어 온, 다니엘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다니엘서]과 일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애서니엄》(The Athenæum), J. 프란시스(J. Francis), 1854년 3월호}}
{{인용문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공개한 대로 '''나보니두스의 장남 벨사살'''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그 벨사살'''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위대한 역사적 문제를 설명할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벨사살이 그의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서 바벨론의 통치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바벨론 도시는 메대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에게 공격당했고 뒤이은 습격으로 멸망했을 것이다. 당시 군대를 이끌어 도시를 구하려던 나보니두스는 패배하고 인근 도시인 보르시파(또는 비르시님루드)로 피난해야 했고, 잠시 저항하다가 항복했다. <small>[고대 바벨론의 역사가]</small> 베로수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보니두스는 이후 카르마니아에서 명예로운 퇴위 명령을 받았다. 실제로, '''나보니두스의 아들인 벨사살의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역사<small>―예를 들어, 그것은 헤로도토스와 베로수스와 관련이 있지만 크세노폰의 로맨스나 크테시아스의 우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small>를 우리 종교를 이해하는 데 장벽이 되어 온, 다니엘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다니엘서]과 일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J. 프랜시스,《애서니엄》(The Athenæum), 1854년 3월호, 341쪽}}


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벨사살의 실존 증거가 됨과 동시에 또 다른 의혹을 해결해 주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왕은 다니엘에게 "꿈을 해석하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약속하고, 실제 그렇게 했다. 이 기록은 성경 학자들 사이에 오랜 의문이 되어 왔다. 벨사살이 왕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면 '둘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해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나보니두스 실린더와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벨사살의 실존 증거가 됨과 동시에 또 다른 의혹을 해결해 주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왕은 다니엘에게 "글자를 읽고 해석하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약속하고, 실제 그렇게 했다. 이 기록은 성경 학자들 사이에 오랜 의문이 되어 왔다. 벨사살이 왕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다니엘이 글을 해석하면 '둘째 치리자'를 삼겠다고 해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인용문5 |내용=[벨사살] 왕이 크게 소리하여 ...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출처=[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다니엘#5장 다니엘 5:7-31]}}
{{인용문5 |내용=[벨사살] 왕이 크게 소리하여 ...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무리로 다니엘에게 자주옷을 입히게 하며 금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니라'''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출처=[https://ko.wikisource.org/wiki/개역한글판/다니엘#5장 다니엘 5:7-31]}}
이 의문은 나보니두스 연대기가 발견됨으로써 해소됐다. 부왕 나보니두스가 나라의 첫째 치리자이고, 벨사살이 둘째 치리자였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셋째 치리자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경 다니엘서의 기록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이 의문은 나보니두스 연대기가 발견됨으로써 해소됐다. 부왕 나보니두스가 나라의 첫째 치리자이고, 벨사살이 둘째 치리자였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셋째 치리자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성경 다니엘서의 기록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