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종교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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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urkey-Iznik_Nicaea.png|섬네일|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니케아(현재 이즈니크)는 튀르키예(터키) 서북부 이즈니크호 동쪽 연안에 있다.]] | [[파일:Turkey-Iznik_Nicaea.png|섬네일|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니케아(현재 이즈니크)는 튀르키예(터키) 서북부 이즈니크호 동쪽 연안에 있다.]] | ||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소아시아의 [https://www.google.com/maps/place/%ED%84%B0%ED%82%A4+%EB%B6%80%EB%A3%A8%EC%82%AC+%EC%9D%B4%EC%A6%88%EB%8B%88%ED%81%AC+%EB%8B%88%EC%B9%B4%EC%9D%B4%EC%95%84/@40.4304772,29.6972329,14z/data=!3m1!4b1!4m5!3m4!1s0x14cb0bc05d7864f5:0x17b677c58432bec8!8m2!3d40.429524!4d29.719743 니케아(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니크)]에서 열린 세계적 공의회<ref>{{웹 인용 |url=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pageSize=10&searchKeyword=%EA%B3%B5%EC%9D%98%ED%9A%8C |제목="공의회" |웹사이트=표준국어대사전|출판사=국립국어원 |인용문=교황이 온 세계의 추기경, 주교, 신학자 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공식적인 종교 회의.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교리나 규율에 관하여 토의하고 규정한다.}}</ref>다. '니케아 종교회의'라고도 한다.<br> |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소아시아의 [https://www.google.com/maps/place/%ED%84%B0%ED%82%A4+%EB%B6%80%EB%A3%A8%EC%82%AC+%EC%9D%B4%EC%A6%88%EB%8B%88%ED%81%AC+%EB%8B%88%EC%B9%B4%EC%9D%B4%EC%95%84/@40.4304772,29.6972329,14z/data=!3m1!4b1!4m5!3m4!1s0x14cb0bc05d7864f5:0x17b677c58432bec8!8m2!3d40.429524!4d29.719743 니케아(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니크)]에서 열린 세계적 공의회<ref>{{웹 인용 |url=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pageSize=10&searchKeyword=%EA%B3%B5%EC%9D%98%ED%9A%8C |제목="공의회" |웹사이트=표준국어대사전|출판사=국립국어원 |인용문=교황이 온 세계의 추기경, 주교, 신학자 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공식적인 종교 회의.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교리나 규율에 관하여 토의하고 규정한다.}}</ref>다. '니케아 종교회의'라고도 한다.<br> | ||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787년 두 차례 개최됐다. 제1차는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소집한, 로마 가톨릭교회 최초의 종교 회의다. 주요 의제는 [[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파스카 논쟁]]과 [ |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787년 두 차례 개최됐다. 제1차는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소집한, 로마 가톨릭교회 최초의 종교 회의다. 주요 의제는 [[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파스카 논쟁]]과 [[아리우스주의#아리우스주의 논쟁의 역사|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제2차는 787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여황 이레네가 소집해 [https://opendic.korean.go.kr/dictionary/view?sense_no=1294297&viewType=confirm 성화상(聖畫像)] 숭배를 가결했다. 일반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라고 하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가리킨다.<br> | ||
세계 공의회는 '에큐메니컬 공의회(Ecumenical Councils, 라틴어: Concilium Ecumenicum)'라고도 하는데, 주교들의 토론으로 정통과 이단을 갈랐으며 역사적으로 일곱 번 이루어졌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제1차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A%B3%BC_%EB%B9%84%EC%9E%94%ED%8B%B4_%EB%AC%B8%ED%99%94#%EC%BD%98%EC%8A%A4%ED%83%84%ED%8B%B0%EB%85%B8%ED%94%8C_%EA%B3%B5%EC%9D%98%ED%9A%8C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7%B8%EB%A6%AC%EC%8A%A4%EB%8F%84_%EA%B5%90%ED%9A%8C%EC%99%80_%EB%A1%9C%EB%A7%88_%EC%A0%9C%EA%B5%AD#%EC%97%90%ED%8E%98%EC%86%8C%EC%8A%A4_%EA%B3%B5%EC%9D%98%ED%9A%8C 에페소 공의회](431),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7%B8%EB%A6%AC%EC%8A%A4%EB%8F%84_%EA%B5%90%ED%9A%8C%EC%99%80_%EB%A1%9C%EB%A7%88_%EC%A0%9C%EA%B5%AD#%EC%B9%BC%EC%BC%80%EB%8F%88_%EA%B3%B5%EC%9D%98%ED%9A%8C 칼케돈 공의회](451),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다. 공교롭게도 세계 7대 공의회의 처음과 마지막이 니케아에서 열렸다. | 세계 공의회는 '에큐메니컬 공의회(Ecumenical Councils, 라틴어: Concilium Ecumenicum)'라고도 하는데, 주교들의 토론으로 정통과 이단을 갈랐으며 역사적으로 일곱 번 이루어졌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제1차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A%B3%BC_%EB%B9%84%EC%9E%94%ED%8B%B4_%EB%AC%B8%ED%99%94#%EC%BD%98%EC%8A%A4%ED%83%84%ED%8B%B0%EB%85%B8%ED%94%8C_%EA%B3%B5%EC%9D%98%ED%9A%8C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7%B8%EB%A6%AC%EC%8A%A4%EB%8F%84_%EA%B5%90%ED%9A%8C%EC%99%80_%EB%A1%9C%EB%A7%88_%EC%A0%9C%EA%B5%AD#%EC%97%90%ED%8E%98%EC%86%8C%EC%8A%A4_%EA%B3%B5%EC%9D%98%ED%9A%8C 에페소 공의회](431),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7%B8%EB%A6%AC%EC%8A%A4%EB%8F%84_%EA%B5%90%ED%9A%8C%EC%99%80_%EB%A1%9C%EB%A7%88_%EC%A0%9C%EA%B5%AD#%EC%B9%BC%EC%BC%80%EB%8F%88_%EA%B3%B5%EC%9D%98%ED%9A%8C 칼케돈 공의회](451),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다. 공교롭게도 세계 7대 공의회의 처음과 마지막이 니케아에서 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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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Nikea-arius.png|섬네일| | [[File:Nikea-arius.png|섬네일|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그리스 메테오른 수도원의 성화]] | ||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니케아에 있는 로마제국 황제의 별궁에서 약 2개월간 열렸다. 세계 교회의 문제였던 아리우스 논쟁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파스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 외에도 교회 구조, 성직자 품위, 배교자들의 재입교와 공개적 참회 등의 교회법을 정했다.<br>니케아 공의회의 특이점은 종교회의를 교회 감독이 아니라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최했다는 점이다. 감독들의 체제 기간 경비도 황실에서 지불했다.<ref>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니케아에 있는 로마제국 황제의 별궁에서 약 2개월간 열렸다. 세계 교회의 문제였던 아리우스 논쟁과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파스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 외에도 교회 구조, 성직자 품위, 배교자들의 재입교와 공개적 참회 등의 교회법을 정했다.<br>니케아 공의회의 특이점은 종교회의를 교회 감독이 아니라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최했다는 점이다. 감독들의 체제 기간 경비도 황실에서 지불했다.<ref name=":0">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7, 225쪽</ref> | ||
===개요=== | ===개요=== | ||
*'''기간''': 325년 5–6월 | *'''기간''': 325년 5–6월 | ||
*'''소집자''': 콘스탄티누스 황제 | *'''소집자''': 콘스탄티누스 황제 | ||
*'''장소''': 니케아, 황제의 별궁<ref | *'''장소''': 니케아, 황제의 별궁<ref name=":0" /> | ||
*'''참석자''': 동방과 서방 교회 감독 300여 명<ref>《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467쪽, “참석자 수는 250명(에우세비오), 270명(에우스타시오), 300명 이상(콘스탄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아타나시오는 318명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 이는 아브라함의 종 318명(창세 14, 14)을 의미하는 성서상의 상징적 숫자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동방에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318명의 공의회'로 부르곤 하였다.”</ref> | *'''참석자''': 동방과 서방 교회 감독 300여 명<ref>《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467쪽, “참석자 수는 250명(에우세비오), 270명(에우스타시오), 300명 이상(콘스탄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아타나시오는 318명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 이는 아브라함의 종 318명(창세 14, 14)을 의미하는 성서상의 상징적 숫자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동방에서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를 '318명의 공의회'로 부르곤 하였다.”</ref> | ||
*'''주요 의제''': ① 아리우스 논쟁 {{공백|2}}② 부활절 날짜 문제<ref>조인형, 《초기기독교사연구》, 한국학술정보, 2002, 435쪽,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취급한 안건들은 니케아 신조와 '''부활절의 절기 문제''' ....”</ref><ref>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휴머니스트, 2015, “니케아 공의회는 ... 회의에서는 이단 문제 이외에도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ref> | *'''주요 의제''': ① 아리우스 논쟁 {{공백|2}}② 부활절 날짜 문제<ref>조인형, 《초기기독교사연구》, 한국학술정보, 2002, 435쪽,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취급한 안건들은 니케아 신조와 '''부활절의 절기 문제''' ....”</ref><ref>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휴머니스트, 2015, “니케아 공의회는 ... 회의에서는 이단 문제 이외에도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는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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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주의 이단 규정=== | ===아리우스주의 이단 규정=== | ||
[[File:Nicaea icon.jpg|섬네일|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공포해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 [[File:Nicaea icon.jpg|섬네일|니케아 신조를 공포하는 모습을 묘사한 성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공포해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 ||
*'''아리우스 파문''' | *'''아리우스 파문''' | ||
니케아 공의회의 쟁점 사안 중 하나는 '아리우스 논쟁(Arius Controversy)'이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A2%85%EA%B5%90%C2%B7%EC%B2%A0%ED%95%99/%EC%84%B8%EA%B3%84%EC%9D%98_%EC%A2%85%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C%9D%98_%EC%97%AD%EC%82%AC#%EC%95%84%EB%A6%AC%EC%9A%B0%EC%8A%A4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니케아 공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br> | 니케아 공의회의 쟁점 사안 중 하나는 '아리우스 논쟁(Arius Controversy)'이었다. 아리우스 논쟁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A2%85%EA%B5%90%C2%B7%EC%B2%A0%ED%95%99/%EC%84%B8%EA%B3%84%EC%9D%98_%EC%A2%85%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C%9D%98_%EC%97%AD%EC%82%AC#%EC%95%84%EB%A6%AC%EC%9A%B0%EC%8A%A4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비롯되었다. 니케아 공회의에 참석한 300여 명의 감독 중에는 20여 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br> | ||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은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A2%85%EA%B5%90%C2%B7%EC%B2%A0%ED%95%99/%EC%84%B8%EA%B3%84%EC%9D%98_%EC%A2%85%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C%9D%98_%EC%97%AD%EC%82%AC#%EC%95%84%ED%83%80%EB%82%98%EC%8B%9C%EC%9A%B0%EC%8A%A4 아타나시우스]였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하다(호모우시오스[Homoousios, 헬라어: ὁμοούσιος, '동일 본질'이라는 뜻])'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이에 반대한 감독은 17명이었는데, 파문하겠다는 황제의 으름장에 최종 반대자는 2명으로 줄었다. 결국 서명을 거부한 아프리카 교회의 두 감독이 아리우스와 함께 파문되어 일리리아로 추방당했으며 아리우스의 책은 불태워졌다. |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은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A2%85%EA%B5%90%C2%B7%EC%B2%A0%ED%95%99/%EC%84%B8%EA%B3%84%EC%9D%98_%EC%A2%85%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A%B7%B8%EB%A6%AC%EC%8A%A4%EB%8F%84%EA%B5%90%EC%9D%98_%EC%97%AD%EC%82%AC#%EC%95%84%ED%83%80%EB%82%98%EC%8B%9C%EC%9A%B0%EC%8A%A4 아타나시우스]였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감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하다(호모우시오스[Homoousios, 헬라어: ὁμοούσιος, '동일 본질'이라는 뜻])'라는 내용의 니케아 신조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이에 반대한 감독은 17명이었는데, 파문하겠다는 황제의 으름장에 최종 반대자는 2명으로 줄었다. 결국 서명을 거부한 아프리카 교회의 두 감독이 아리우스와 함께 파문되어 일리리아로 추방당했으며 아리우스의 책은 불태워졌다. | ||
*'''니케아 신조 채택''' | *'''니케아 신조 채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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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성 빅토르 교황(189-199년 재임) 때, 예수 부활 축일을 소아시아 각 지역 교회에서는 유다인의 빠스카, 즉 니산달 14일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로마에서는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냈었다. 지금처럼 <ins>부활 축일을,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 주일에 지내게 된 것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다음의 일이다.</ins> <br> | {{인용문|성 빅토르 교황(189-199년 재임) 때, 예수 부활 축일을 소아시아 각 지역 교회에서는 유다인의 빠스카, 즉 니산달 14일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고 나서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로마에서는 니산달 14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냈었다. 지금처럼 <ins>부활 축일을, 춘분(3월 21일) 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 주일에 지내게 된 것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다음의 일이다.</ins> <br> | ||
|제임스 C. 기본스,《교부들의 신앙》, 장면 역, 가톨릭출판사, 2005, 139쪽}} | |제임스 C. 기본스,《교부들의 신앙》, 장면 역, 가톨릭출판사, 2005, 139쪽}} | ||
이후 많은 신학자들은 파스카 논쟁을 '부활절 날짜에 대한 논쟁'으로 정의하고 '부활절 논쟁(復活節論爭)'이라 부른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4280&cid=40942&categoryId=31576 "부활절논쟁"], | 이후 많은 신학자들은 파스카 논쟁을 '부활절 날짜에 대한 논쟁'으로 정의하고 '부활절 논쟁(復活節論爭)'이라 부른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4280&cid=40942&categoryId=31576 "부활절논쟁"], 《두산백과 두피디아》</ref> 이는 파스카 논쟁에서 승리한 서방 교회의 주장대로 교회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적합한 표현은 '유월절(파스카)<ref>{{웹 인용 |url=https://dict.naver.com/grckodict/#/entry/grcko/76596fbc602d4570be2edc392946df73 |제목="πάσχα" |웹사이트=네이버 고대 그리스어사전 |인용문=<small>1. 고유명사</small> 유월절.}}</ref> 논쟁'이다. | ||
<small>{{참고|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l1=파스카 논쟁|설명=더 자세한 내용은}}</small> | <small>{{참고|파스카 논쟁 (유월절 논쟁)|l1=파스카 논쟁|설명=더 자세한 내용은}}</small> | ||
==니케아 공의회의 한계== | ==니케아 공의회의 한계== | ||
===니케아 신조의 오류=== | ===니케아 신조의 오류=== | ||
*'''모호한 신조''' | *'''모호한 신조''' | ||
니케아 공회의에서 채택한 '[[성부 (여호와)|성부]]와 [[성자 (예수)|성자]]는 동등하다'라는 신조는 아리우스파를 일시적으로 단죄했을지는 몰라도, 이 또한 성경적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로 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는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개념이 모호하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91-95쪽,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정말 난해한 용어였다. ... 그러니까 호모우시오스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고안하고, 세례받지 않은 황제가 제안하였으며, 순박한 지지자들은 이 용어를 위험스럽게 여겼는데, 마침내 정통교회가 이 용어를 승인하여 '니케아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모순의 상징이 되었다.”</ref>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ref>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57쪽, “기독교도들은 ... 예수의 신격과 삼위 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했다. <br> | 니케아 공회의에서 채택한 '[[성부 (여호와)|성부]]와 [[성자 (예수)|성자]]는 동등하다'라는 신조는 아리우스파를 일시적으로 단죄했을지는 몰라도, 이 또한 성경적 '[[성삼위일체]]'(聖三位一體)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로 쓴 '호모우시오스(ὁμοούσιος)'는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개념이 모호하다.<ref>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이기영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8, 91-95쪽,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는 정말 난해한 용어였다. ... 그러니까 호모우시오스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고안하고, 세례받지 않은 황제가 제안하였으며, 순박한 지지자들은 이 용어를 위험스럽게 여겼는데, 마침내 정통교회가 이 용어를 승인하여 '니케아 신조'에 삽입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엄청난 모순의 상징이 되었다.”</ref>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으며,<ref>자와할랄 네루, 《세계사 편력 1》, 곽복희 외 역, 일빛, 2004, 157쪽, “기독교도들은 ... 예수의 신격과 삼위 일체설(the Trinity)을 놓고 논란과 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서로 이단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박해를 가하고 목을 잘랐으며, 심지어 중모음 하나를 놓고 교파들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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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황제가 개입한 종교 회의=== | ===이방 황제가 개입한 종교 회의=== | ||
[[파일: | [[파일:Constantine I- RIC VI 890-886182 AugTrever.jpg|섬네일|240x240픽셀|콘스탄티누스 1세의 동전. 동전의 뒷면에는 무적의 태양신이 묘사되었으며 '[http://www.forumancientcoins.com/numiswiki/view.asp?key=soli%20invicto%20comiti 황제의 동반자인 무적의 태양신에게]'라는 뜻의 솔리 인빅토 코미티(SOLI INVICTO COMITI)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 ||
[[파일:ChristAsSol.jpg|섬네일|240px| 4세기경 제작된 모자이크에는 그리스도가 태양신으로 묘사되었다.]] | [[파일:ChristAsSol.jpg|섬네일|240px| 4세기경 제작된 모자이크에는 그리스도가 태양신으로 묘사되었다.]] | ||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에 호의를 베풀던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완전히 장악한 뒤에 교회를 이용해 로마제국 전체를 신권정치로 다스렸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74-77쪽,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공의회 ... 결과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다. 그는 모든 주요한 쟁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것도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합을 이룬 것은 물론 그 자신이 통합된 교회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절대자가 되었다.”</ref><ref>이노우에 고이치,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 제국》, 이경덕 역, 다른세상, 2010, 43-56쪽, “콘스탄티누스는 교의의 문제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이나 지식을 갖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 로마 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처럼 국가와 종교가 합치된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ref><br> |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에 호의를 베풀던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완전히 장악한 뒤에 교회를 이용해 로마제국 전체를 신권정치로 다스렸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창건과 혼란》, 남경태 역, 바다출판사, 2016, 74-77쪽,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공의회 ... 결과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다. 그는 모든 주요한 쟁점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그것도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합을 이룬 것은 물론 그 자신이 통합된 교회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절대자가 되었다.”</ref><ref>이노우에 고이치,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 제국》, 이경덕 역, 다른세상, 2010, 43-56쪽, “콘스탄티누스는 교의의 문제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이나 지식을 갖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쏟은 것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 로마 제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처럼 국가와 종교가 합치된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ref><br> | ||
콘스탄티누스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로마의 최고 신이었던 태양신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시했으며, 죽을 때까지 고대 로마 종교의 최고 제사장을 가리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의 칭호를 고수했다.<ref | 콘스탄티누스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로마의 최고 신이었던 태양신을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시했으며, 죽을 때까지 고대 로마 종교의 최고 제사장을 가리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의 칭호를 고수했다.<ref name=":1" /> 또한 자신에게 신적인 칭호와 '무적의 태양(라틴어: Sol Invictus, 솔 인빅투스)'이라는 수식어까지 부여했다.<ref name=":1"> 이냐시오 오르티츠 데 우르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황치헌 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27-28쪽</ref> 역사가와 기독교 신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시점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인 312년으로 보나,<ref>김경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세창출판사, 2019, 68쪽, “기독교 측은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승리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개종을 연결짓는 신화를 만들었다.”</ref><ref>폴 존슨,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김주한 역, 포이에마, 2013, "기독교 변증가들의 선전에 따르면, 밀리노 칙령은 ... 밀비안 다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가 반포한 것이라고 한다."</ref><ref>닐 맥그리거,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강미경 역, 다산초당, 2014, 324쪽, “‘카이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에 채택한 상징이다. ... 밀비아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ref>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발행한 화폐에는 여전히 태양신 숭배 사상이 투영돼 있다. 그가 315년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신'과 '황제의 동반자인 무적의 태양신에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316년에 발행한 화폐에도 자신을 '태양신의 동반자'로 묘사하고 있다.<ref>[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C_1863-0713-1 "coin"], ''British Museum'', "Constantine is shown and described as the ‘companion’ of the sun god on a coin minted nearly four years after his reported conversion to Christianity on the eve of 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ref> 콘스탄티누스의 영향으로 태양신교 신앙의 의식과 교리, 문화 등이 기독교에 대부분 수용되었다.<ref>라이온사 편, 《교회사 핸드북》, 송광택 역, 생명의말씀사, 1997, 130-131쪽</ref> | ||
==니케아 공의회 이후== | ==니케아 공의회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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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부황제로 임명했다.<br> | ||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br> |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ref>《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ref> | ||
<small>{{참고|아리우스주의|l1=아리우스주의|설명=더 자세한 내용은}}</small> | <small>{{참고|아리우스주의|l1=아리우스주의|설명=더 자세한 내용은}}</small> |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 ||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에 열렸다. 세계 공의회로는 7번째 공의회다. 주요 의제는 726년 동로마제국 황제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D%94%84%EB%9E%91%ED%81%AC_%EC%99%95%EA%B5%AD%EA%B3%BC_%EC%82%AC%EB%9D%BC%EC%84%BC_%EC%A0%9C%EA%B5%A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A%B7%B8%EB%A6%AC%EC%8A%A4%EC%A0%81_%EA%B5%AD%EA%B0%80_%EC%99%84%EC%84%B1#%EB%A0%88%EC%98%A4_3%EC%84%B8 레오 3세]가 성상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일어난 성화상논쟁(聖畫像論爭)<ref>{{웹 인용 |url=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pageSize=10&searchKeyword=%EC%84%B1%ED%99%94%EC%83%81%EB%85%BC%EC%9F%81 |제목="성화상논쟁" |웹사이트=표준국어대사전 |저널= |출판사=국립국어원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성화 상이나 성화를 모시는 일을 우상 숭배로 볼 것이냐의 여부를 두고 일어난 논쟁. }}</ref>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성상 숭배자였던 이레네 여제가 소집한 제2차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단순한 흠모의 대상에서 경배하는 대상으로 끌어올렸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D%94%84%EB%9E%91%ED%81%AC_%EC%99%95%EA%B5%AD%EA%B3%BC_%EC%82%AC%EB%9D%BC%EC%84%BC_%EC%A0%9C%EA%B5%A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A%B7%B8%EB%A6%AC%EC%8A%A4%EC%A0%81_%EA%B5%AD%EA%B0%80_%EC%99%84%EC%84%B1#%EC%9A%B0%EC%83%81%ED%8C%8C%EA%B4%B4_%EB%85%BC%EC%9F%81|제목="우상파괴 논쟁" |웹사이트=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인용문= 이미 4세기경부터 성화상숭배의 풍조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7세기에 성행이 되었다. ... 787년에 황비 이렌[이레네]은 제7회 공회의(公會議)에서 성화상 숭경을 부활시켰다.}}</ref><ref>{{웹 인용 |url=https://m.hani.co.kr/arti/culture/book/752437.html#cb|제목="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에 드리운 그림자" |웹사이트= |저널=한겨레 |출판사= |날짜=2016. 7. 14. |연도= |인용문=황후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과 협상한 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자 단죄와 성화상 공경 교리가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흠숭'(欽崇·latreia)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proskynesis)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구별법을 활용했다. }}</ref> |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787년에 열렸다. 세계 공의회로는 7번째 공의회다. 주요 의제는 726년 동로마제국 황제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D%94%84%EB%9E%91%ED%81%AC_%EC%99%95%EA%B5%AD%EA%B3%BC_%EC%82%AC%EB%9D%BC%EC%84%BC_%EC%A0%9C%EA%B5%A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A%B7%B8%EB%A6%AC%EC%8A%A4%EC%A0%81_%EA%B5%AD%EA%B0%80_%EC%99%84%EC%84%B1#%EB%A0%88%EC%98%A4_3%EC%84%B8 레오 3세]가 성상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일어난 성화상논쟁(聖畫像論爭)<ref>{{웹 인용 |url=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pageSize=10&searchKeyword=%EC%84%B1%ED%99%94%EC%83%81%EB%85%BC%EC%9F%81 |제목="성화상논쟁" |웹사이트=표준국어대사전 |저널= |출판사=국립국어원 |날짜= |연도= |저자= |쪽= |시리즈= |isbn= |인용문=성화 상이나 성화를 모시는 일을 우상 숭배로 볼 것이냐의 여부를 두고 일어난 논쟁. }}</ref>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성상 숭배자였던 이레네 여제가 소집한 제2차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단순한 흠모의 대상에서 경배하는 대상으로 끌어올렸다.<ref>{{웹 인용 |url=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D%94%84%EB%9E%91%ED%81%AC_%EC%99%95%EA%B5%AD%EA%B3%BC_%EC%82%AC%EB%9D%BC%EC%84%BC_%EC%A0%9C%EA%B5%AD/%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A%B7%B8%EB%A6%AC%EC%8A%A4%EC%A0%81_%EA%B5%AD%EA%B0%80_%EC%99%84%EC%84%B1#%EC%9A%B0%EC%83%81%ED%8C%8C%EA%B4%B4_%EB%85%BC%EC%9F%81|제목="우상파괴 논쟁" |웹사이트=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인용문= 이미 4세기경부터 성화상숭배의 풍조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7세기에 성행이 되었다. ... 787년에 황비 이렌[이레네]은 제7회 공회의(公會議)에서 성화상 숭경을 부활시켰다.}}</ref><ref>{{웹 인용 |url=https://m.hani.co.kr/arti/culture/book/752437.html#cb|제목="찬란했던 비잔틴 제국에 드리운 그림자" |웹사이트= |저널=한겨레 |출판사= |날짜=2016. 7. 14. |연도= |인용문=황후 이레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함께 로마 교황과 협상한 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화상 파괴자 단죄와 성화상 공경 교리가 확정되었다. 이를 위해 '흠숭'(欽崇·latreia)은 하느님께만 해당되고 '공경'(proskynesis)은 피조물에게도 해당된다는 구별법을 활용했다. }}</ref> | ||
== 관련 영상== | ==관련 영상== | ||
*'''사라진 유월절''' | *'''사라진 유월절''' | ||
<youtube>IJElZ7CP_Wg</youtube> | <youtube>IJElZ7CP_Wg</youtub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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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 | *[[성삼위일체]] | ||
*[[아리우스주의]] | *[[아리우스주의]] | ||
* [[주일예배 (일요일 예배)]] | *[[주일예배 (일요일 예배)]] | ||
*[[유월절]] | *[[유월절]] | ||
==외부 링크== | ==외부 링크== | ||
*[https://watv.org/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 *[https://watv.org/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 ||
==각주 == | ==각주== | ||
<references /> | <references /> | ||
[[분류:성경 이슈]] | [[분류:성경 이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