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 (니케아 종교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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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축출된 듯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은 곧 과거에 몸담았던 교회로 돌아왔다.<ref>남성현,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기독교적 입법정책》, 한국학술정보, 2013, 25쪽</ref> 이들은 음모를 꾸며 반대파 세력을 추방했으며, 336년 아리우스가 죽은 후로도 아리우스주의가 득세했다.<br> |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337년 콘스탄티누스 사후 니케아 신조를 옹호한 콘스탄스(재위: 337–350)는 서로마 황제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B%A1%9C%EB%A7%88_%EC%A0%9C%EA%B5%AD%EC%9D%98_%EB%A9%B8%EB%A7%9D#%EC%BD%98%EC%8A%A4%ED%83%84%ED%8B%B0%EC%9A%B0%EC%8A%A4_2%EC%84%B8 콘스탄티우스 2세](재위: 337–361)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제국의 단독 군주가 되자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이 박해받았다.<br> |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 364년, 로마는 다시 이분(二分)되어 동로마는 급진적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재위: 364–378)가 통치했다. 니케아 신조를 좇는 가톨릭 주교는 유배를 떠나거나 박해를 받았다. 378년 발렌스가 전사하자 당시 서로마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재위: 375–383)가 동로마를 지배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발렌스가 추방한 주교들을 복직시켰고, 379년에는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의 황제로 선임했다.<br> | ||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br> |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확고한 니케아 신앙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해 아리우스주의를 금지시킴으로써 아리우스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 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4세기부터 북쪽에서 서로마 영토로 내려온 게르만족 사이에는 계속 존속했다.<br> |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ref>《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ref> |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했다. 아리우스파 민족이 서로마를 점령한 것이다. 527년, 동로마 황제로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재위: 527–565)는 로마 교황을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공식 선언했고, 아리우스주의를 고수한 아프리카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반달 왕국], 이탈리아의 [https://ko.wikisource.org/wiki/%EA%B8%80%EB%A1%9C%EB%B2%8C_%EC%84%B8%EA%B3%84_%EB%8C%80%EB%B0%B1%EA%B3%BC%EC%82%AC%EC%A0%84/%EC%84%B8%EA%B3%84%EC%82%AC/%EC%A4%91%EC%84%B8_%EC%9C%A0%EB%9F%BD%EA%B3%BC_%EC%95%84%EC%8B%9C%EC%95%84/%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C%84%B1%EB%A6%BD/%EA%B2%8C%EB%A5%B4%EB%A7%8C_%EB%AF%BC%EC%A1%B1%EC%9D%98_%EB%8C%80%EC%9D%B4%EB%8F%99#%EB%B0%98%EB%8B%AC%EC%A1%B1 동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게르만족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하고 니케아 신조와 로마 교회를 따르게 되었다.<ref>《기독교대백과사전》 제10권, 기독문화사, 2003, 932쪽, “모든 야만 왕국은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이탈리아의 오스트로고트(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의 경우처럼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민족적 멸망의 원인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주요 아리우스주의 민족들은 부르군트족·비시고트족·롬바르드족이었다. 이들 각 민족은 격심한 투쟁을 거친 뒤 차례로 자기들이 배웠던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니캐아-로마 신앙으로 바꾸었다.”</ref> | ||